옛날에는 음식재료가 없거나 혹은 너무 비싸서 먹고 싶은 것도 못먹고 살았지만 포식의 시대라 불리는 현대인들은 적어도 먹고싶은 것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렇게 풍부한 음식이 있는데도 한편에서는 ‘살을 빼고 싶다’ 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먹지 않기 운동’이 많은 여성들에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다이어트는 주간지의 3대 테마 중 하나로서 지면을 채우고 있으며 비만 클리닉이라는 간판은 한집 걸러 한집꼴로 퍼져 있을 정도다. 이런 현상 속에서 단지 살을 빼고 싶다는 희망과는 다른 ‘병’으로서 사춘기 여자아이들에게 식사를 거부하는 ‘거식증’과 이것저것 쉴새 없이 먹어 치우는 ‘과식증’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식사를 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의 범위를 넘어선 ‘삶에 대한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 섭식장애에 대한 연구나 치료도 상당히 진척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게 현실이다. 섭식장애란 식사의 본래목적인 영양보충이나 체력증진과는 거리가 먼 마음의 문제나 적응문제를 감추려하거나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이용되는 상태를 말한다. 증상으로서는 ‘거식증’과 ‘과식증’이 있다. 1) 거식증 거식증은 체력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야위었는데도 과도하게 더 살을 빼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너가 이 병에 걸렸다하여 한동안 일반인들에게 화재가 된 일이 있다. 또한 얼마전 이 병에 걸린 가정주부가 자살을 하여 경각심을 깨우쳐 주기도 했다. 체중을 감소시키려는 행동은 대체로 비밀스럽게 한다. 보통 가족과 함께 또는 공공장소에서 식사하려고 하지 않거나 살찌는 것에 대한 강박적 혐오에 대한 충동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음식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 늘 음식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요리 책을 수집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기도 한다. 때때로 아는 사람 몰래, 대개 밤중에 게걸스럽게 많이 먹기도 하는 과식증을 보이나 그때는 일부러 토해 버리기 일쑤다. 설사제, 심지어 이뇨제까지 남용하여 체중을 줄이려 하는데 이 경우는 흔히 약물중독으로까지 발전한다. 또한 이 때문에 후유증으로 구강, 식도, 위장계에 상처가 생기고 신체 대사장애로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체중이 감소됨에도 불구하고 일반 활동은 여전히 평소와 같이 왕성한 수가 많다. 그러나 그 왕성한 행동은 의도적이고 강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하면 체중이 계속 감퇴하다 가 결국 죽기도 한다. 거식증 환자들은 체중증가나 비만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왜곡된 신체상으로 인해 체중 미달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체중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도록 거울이나 사진 등을 보여줘도 그것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거식증은 인간 대뇌에서 식욕, 체온, 그리고 다양한 신경내분비 기능을 담당하는 중추인 시상하부의 이상이 발병 원인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며, 일부는 유전적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날씬함과 운동, 젊은 모습을 강조하여 거식증이 생긴다는 주장도 있는데, 패션모델이나 발레리나, 운동선수와 같이 체중과 관련된 직업적 경쟁이 심한 경우 거식증의 발병률이 더 높다는데서 그 근거를 주장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는 발달상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성적, 사회적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음식을 피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정신분석학에서는 부모로부터 적절한 독립을 하지 못하여 왜곡된 행동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을 얻으려는 노력 등이 가설로서 주장되고 있다. 그 원인이 어떻든 거식증은 생명과 직결된다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거식증 환자의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은 가급적 빨리 영양의 균형을 회복시켜 기아로 인한 신체적 손상을 막고 체중증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입원치료, 심리치료, 가족치료, 약물치료를 포함한 종합적인 치료계획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환자의 견해에 공감해주고, 환자 나름대로의 생각, 느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2) 과식증 과식증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 쉴새없이 먹지만 결국 먹은 것을 모두 토하는 특징이 있다. 거식증 환자의 30~50%에서 과식증 증세를 보인다고 하는데 보통 거식증이 발생한 후 1년 반 이내에 발생한다. 거식증에서 발전한 것이든 거식기가 없는 과식증이든 섭식장애의 과식은 정상인들보다 지나치게 많이 먹고, 그에 따르는 체중증가를 막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하거나 혹은 손가락을 집어넣어 일부러 토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구토뿐만이 아니라 관장약이나 이뇨제 등의 약물을 사용하는 등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이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우울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전반적인 자아상의 왜곡까지 가져오게 된다. 그 외에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우울증 상태가 되는 사람, 사람들과 만날 수 없어서 집안에만 웅크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 손목을 베는 등의 자해를 되풀이하거나, 가출을 하거나, 가족에게 폭력이나 폭언을 일삼거나, 동시에 여러 이성과 교제를 해 육체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다. 결국 우울, 불안, 초조에서 야기되는 반사행위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과식에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단순한 과식, 예를 들면 세끼 식사 외에 간식을 먹는 수준을 약간 웃도는 가벼운 과식에서부터 매일 한밤중에 큰 냄비에 가득 야채나 고기를 볶아 새벽녘까지 먹어대는 과격한 과식증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사실 날씬한 몸매를 갈망하면서 먹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과식증이 점점 심해질수록 날씬한 몸매의 갈망, 비만에 대한 공포심이 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방대한 음식을 먹은 후 모두 토해버리거나 설사약을 사용해 배설해버리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과식과 비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다. 첫 번째로, 과식 행동이 사람들을 비만하게 만들거나 체중증가를 일으킨다는 가정이다. 두 번째로, 체형과 체중은 유전적인 요인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과식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과체중이 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고, 이로 인해 이들이 다이어트를 하게되며, 결국은 과식도 하게된다는 가정이다. 세 번째로 과체중이면서 과식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살을 빼고자 다이어트를 하게되며, 이것이 과식을 불러오면서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비만을 유지하거나 악화시키게되는 악순환을 유지하게된다는 가정이다. 하지만 과식증을 가진 사람들 중 소수만이 과체중이다. 이는 과식증인 사람들이, 스스로 구토를 유도하거나 약물을 사용하여 극단적인 체중조절을 하기 때문이다. 과식증의 원인으로는 심리적, 생물학적 측면에서 거식증과 유사한 가설들이 주장되고 있으나 역시 거식증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이유는 알지 못하는 상태다. 단기간의 경과는 전반적으로 거식증에 비해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기간의 경과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진단은 정상수준을 넘어서는 심한 과식과 그에 따른 체중증가를 막기 위한 구토와 관장약, 이뇨제 등의 약물사용이 있어야하고 이런 행동이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씩 3개월 동안 지속되어야한다. 과식증과 거식증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음식을 거부한다는 뜻의 거식증은 즉 먹지 않는 질병이다. 하지만 거식증 환자를 오래도록 지켜보면 갑자기 과식으로 돌변해 격렬한 과식증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사실 거식증 그대로의 상태를 오래 지속하는 환자는 극히 적다는 뜻이다. 거식증과 과식증을 통틀어 섭식장애(攝食障碍)라고 부르는데 섭식장애의 거의가 과식을 경험하고 있다. 즉 뿌리가 같은 질병이라는 뜻이다. 한 쪽은 너무 많이 먹고 한 쪽은 전혀 먹지 않는 다는 것이 다르지만 모두 날씬한 몸매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를 할 때 지나치게 굶으면 몸에서는 자연적으로 영양소의 공급을 원하게 되고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과식을 하게된다. 과식을 하는 동안에는 엄격하게 다이어트를 해 왔던 사람일수록 더욱 음식에 대한 자제력을 상실하게 되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과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사춘기 섭식장애 환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것일까? 사춘기는 아이들이 최초로 가족 이외에서의 관계를 형성하는 시기로 가족과의 고착에서 멀어져 현실적인 자기개념을 전개하는 시기다. 즉, 자기의 가치를 내보이려고 하는 시기다. 사회적인 분위기는 외모 지상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모와 날씬한 몸매에 열광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얼짱’ ‘몸짱’ 등 수많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고 한참 민감할 나이인 사춘기 아이들은 몸매가 날씬하지 않으면 주목받지 못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사교성이 좋고 유머가 풍부해도 얼굴과 몸매가 받쳐주지 않으면 연애도 취업도 결혼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편견을 갖기 쉽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엉뚱하게도 아직 어린 사춘기 아이들에게 살을 빼는 일, 얼굴이 예뻐지는 일 등 외모에만 신경 쓰도록 몰고 간다. 하지만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면 여간해서는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춘기 섭식장애다. |